일본국 사자 유영이 임성 태자가 일본에 들어간 기록을 찾아 주기를 청하다
일본국(日本國) 대내전(大內殿) 사자(使者) 유영(有榮)이 예조(禮曹)에 글을 올리기를,
"다다량씨(多多良氏)가 일본국(日本國)에 들어갔는데, 그 까닭은 일본에서 일찍이 대련(大連) 등이 군사를 일으켜 불법(佛法)을 멸(滅)하고자 하였고, 우리 나라 왕자 성덕 태자(聖德太子)는 불법(佛法)을 높히고 공경하였기 때문에 교전(交戰)하였으므로 이때 백제국왕(百濟國王)이 태자 임성(琳聖)에게 명하여, 대련(大連) 등을 치게 하였으니, 임성(琳聖)은 대내공입니다. 이러한 까닭으로 성덕 태자(聖德太子)께서 그 공을 가상히 여겨서 주군(州郡)을 하사한 이래로 그 거주(居住)하는 땅은 ‘대내공 조선(大內公朝鮮)이라고 부릅니다. 지금 대내 후손(後孫)의 부정(否定)이 있지만 기로(耆老)542) 가운데 박식하고 통달한 군자가 있어서 그 계보(系譜)가 상세합니다. 대련 등이 군사를 일으킨 때가 일본국 경당(鏡當)543) 4년인데 수(隋)나라 개황(開皇)544) 원년(581년)에 해당하니, 경당(鏡當) 4년에서 경태(景泰)545) 4년546) 까지가 모두 8백 73년입니다. 귀국(貴國)에는 반드시 임성 태자(琳聖太子)가 일본에 들어간 기록(記錄)이 있을 것입니다. 대내공의 식읍(食邑)의 땅은 대대로 병화(兵火)로 인하여 본기(本記)를 잃어버리었고, 지금 기록한 것은 우리 나라의 남은 늙은이들이 구술(口述)로써 서로 전하여 왔을 뿐입니다."
하니, 즉시 춘추관(春秋館)과 집현전(集賢殿)에 명하여 옛 사적(史籍)을 상고하여 이에게 주었는데 그 글에 이르기를,
"옛 글에 이르기를, ‘일본 육주목(六州牧) 좌경 대부(左京大夫)는 백제(百濟) 온조왕(溫祚王) 고씨(高氏)의 후손인데, 그 선조가 난(亂)을 피하여 일본에서 벼슬살이하여 대대로 서로 계승하여 육주목(六州牧)에 이르렀다.’ 하니, 더욱 귀현(貴顯)이 되는데, 근년 이래로 대마도(對馬島) 등 삼도(三島)에서 흉도(兇徒)를 불러 모아서 우리의 변방을 침입하여 어지럽히고 인민들을 노략(虜掠)질하여서 이웃 나라간의 통호(通好)하는 것을 막았었다. 지난번에 대상국(大相國)이 의(義)로써 군사를 일으키고 육주목(六州牧) 자신이 독전(督戰)하여 그 무리들을 진멸(殄滅)하였다. 이 때문에 변경(邊境)이 평안하고 생민들이 생업에 안정(安定)하고 양국(兩國)이 통호(通好)를 수교하게 되었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2책 6권 46장 A면【국편영인본】 6책 601면
- 【분류】외교-왜(倭)
- [註 542]기로(耆老) : 나이 많은 늙은이.
- [註 543]
경당(鏡當) : 일본 천황 민달(敏達)의 연호.- [註 544]
○己酉/日本國 大內殿使者有榮呈書于禮曹曰: "多多良氏入日本國, 其故則日本曾大連等起兵, 欲滅佛法, 我國王子聖德太子崇敬佛法, 故交戰。 此時百濟國王勑太子琳聖討大連等, 琳聖則大內公也。 以故聖德太子賞其功而賜州郡, 爾來稱都居之地, 號大內公朝鮮。 今有大內裔種否定, 有耆老博洽君子, 詳其譜系也。 大連等起兵時, 日本國 鏡當四年也, 當隋 開皇元年也。 自鏡當四年至景泰四年, 凡八百七十三年, 貴國必有琳聖太子入日本之記也。 大內公食邑之地, 世因兵火而失本記矣。 今所記, 則我邦之遺老口述相傳而已。" 卽命春秋館、集賢殿, 考古籍, 書與之。 其書曰:
古書有云: "日本 六州牧左京大夫, 百濟 溫祚王 高氏之後。 其先避亂, 仕於日本, 世世相承, 至于六州牧, 尤爲貴顯。" 比年以來, 對馬等三島嘯聚兇徒, 侵擾我疆, 虜掠人民, 以阻隣好。 頃者, 大相國以義發兵, 六州牧身自督戰, 殄殲其衆。 由是邊境寧靖, 生民安業, 而兩國修好。
- 【태백산사고본】 2책 6권 46장 A면【국편영인본】 6책 601면
- 【분류】외교-왜(倭)
- [註 543]